대유평 지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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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용환(35)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88회 작성일 13-02-15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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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평은 정자2동 지역으로써 지금의 수성고등학교와 수원상공회의소, 연초제조창 일대의 넓은 뜰을 가리킨다.

대유평은 원래 조선시대 국가의 정책적 차원에서 마련된 둔전이었다. 정조대왕은 수원의 읍치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화성을 쌓으면서 수원을 자족적인 도시로 유지하기 위해 만석거(조기정방죽)와 축만제(서호)등의 수리 시설을 축조하고

둔전을 설치 운영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화성을 쌓던 중 극심한 가뭄이 들어 전국적인 피해를 입게 되자 화성 축성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가뭄을 극복할

수리 시설을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를 축조하기로 했다. 이 공사는 1795년(정조19년)

1월에 시작해 5월 18일 완성됐다.

만석거가 축조된 후인 1797년과 1798년 연이은 가뭄으로 삼남지역이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나 수원만은 만석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정조의 권농의지로 축조된 만석거로 인해 그 아래의 땅은 비옥해졌다

정조는 만석거의 축조와 함께 화성밖(북성밖),현재 대유평 일대의 척박한 토지를 개간,둔전을 설치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먼저 기존의 일반 백성들의 논밭을 사들이고 지맥이 풀리는 봄에 땅을 깊이 파서 논과 밭을 만드는등 개간을 하는 한편

말 5마리와 바퀴가 양쪽에 달린 수레가 지나갈수있는도로도 함께 건설하도록 명했는데 이 둔전은 1795년11월에 완성됐다

이 둔전이 대유평인데 여기에는 2만냥이라는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었다고 한다.이렇게 해서 총 109석 14두락이 마련됐다

대유둔전을 설치하고 경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는 화성을 관리하고,보수,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

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는 둔전을 교리, 군졸, 관예 에게 나누어 주면서 2월부터 9월까지 둔전에서 농사를 짓게했다. 정조

는 장용외영을 화성에 두면서 병농이 서로 일치하는 둔전법을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

대유평은 만석거와 함께 이런 정조의 의지가 담겨있는 뜻깊은 지명이다.

수원신문의 허락을 얻고 (자족도시 유지위해 설치한 둔전 대유평) 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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